영화감독 김종민. ©김종민
장애 때문에 생긴 일
김종민은 3형제의 막내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어른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교회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구르는 바람에 왼편 마비로 왼쪽 팔다리는 물론 왼눈도 안 좋고, 왼쪽 치아도 안 좋아서 왼쪽은 움직이는 데 불편함을 느낀다.
평상시에는 별다른 통증을 느끼진 않지만, 긴장하거나 추울 때는 왼편이 경직된다. 가장 어려운 것은 왼쪽 손이 굽어진 것인데 사람들은 그의 장애를 잘 눈치채지 못한다.
사실 스스로도 스무 살 전까지는 장애인이란 인식이 많이는 없었다. 스무 살 이후 ‘장애’라는 문제를 인식했고, 이후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면서부터 장애인들과 오랜 시간을 같이했다. 그러면서 장애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찾아온 영화
김종민은 1979년생이다. 1986년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개최되었을 즈음, 아버지가 비디오 플레이어를 사오셨다.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신프로 2박 3일에 천 원을 내고 첫 비디오를 빌려왔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다섯 번은 족히 봤을 듯하다. 그것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이었다.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천호동의 ‘한일시네마’에서 <천장지구>, <영웅본색> 같은 홍콩영화를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스무 살 때였는데, 강서구의 ‘화면 속으로’라는 비디오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에 두세 편은 기본적으로 봤으니까, 1년에 800편 넘게 영화를 봤다. 그때는 장르도 가리지 않고 예술영화부터 성인영화까지 모두 다 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한겨레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 공부를 하였다. 교육을 마치자 영화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스물네 살 때 처음 영화 현장에 들어갔 는데 기대했던 것과 달라서 정말 힘들었어 요. 제가 하는 일들은 담배꽁초를 줍거나 식당을 섭외하고, 차를 통제하는 일이 전부였거든요. 영화판에 들어가면 영화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괴리감이 생기더 라구요.
그때 당시 장애인으로서 영화계 일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 제가 처음이었어요. 영화 쪽에 계시는 분들도 저밖에 못 봤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잘못하면 이 사람들에게 장애인에 대해 편견이 생기잖아요. ‘그렇지! 역시 장애인은 뽑으면 안 되겠다.’라는… 그래서 여기서 내가 잘못하면 나중에 장애가 있는 후배들이 아예 영화판에 들어갈 길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하다 보니 주변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요. 그럴 때 엄청 뿌듯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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